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 침공 (문단 편집) ==== 침공 초기 ==== 침공함대가 출항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징발된 [[독일]] [[상선]] [[리우 데 자네이루]] 호가 망명 폴란드 정부의 지휘를 받는 [[폴란드군|폴란드 해군]] [[잠수함]] [[오제우]](ORP Orzeł)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오제우 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해안지대를 방어하다가 [[에스토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억류되었다가 이후 새로 선출된 함장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을 탈취하여 다시 도주하고(...) '''해도를 압수당하고 통신장비도 사격으로 고장난 상황에서 영국까지 항해'''한 잠수함이다. 실로 [[전투종족]]인 셈. 리우 데 자네이루 격침 당시 먼저 위협사격을 가해서 정선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불응하자 어뢰를 쐈고, 리우 데 자네이루의 격침으로 승선하고 있던 200여 명의 독일 육군이 사망했다. 그러나 오제우는 이것을 단순한 통상 파괴로만 생각했지 대규모 침공 상황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고, 또한 통신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격침 사실을 보고하지 못해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연합군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비교적 일찍 파악했는데, 항공정찰로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관측한 것이 4월 8일 오전이었다. 만약 이때 영국 함대가 독일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발했으면 독일군의 침공은 그대로 좌절이었겠지만, '''영국은 독일측의 의도를 오판해 버린다.'''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해상봉쇄를 뚫고 북대서양으로 돌파하려는 시도거나 [[북해]]에 분산된 영국 함대를 타격하려는 의도로 오판하고 대규모 함대결전 준비에 나선 것이다. 영국 해군은 즉시 전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고,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군함에 탑승했던 해병대원들은 즉시 짐과 함께 영국 본토의 항구에 도로 내동댕이쳐졌다. 사실상 독일군이 먼저 행동을 해버린 덕분에 영국 입장에선 노르웨이 침략 계획인 윌프레드 및 R4보다 눈앞의 독일 해군을 격멸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전력을 다해 북해를 샅샅히 수색했음에도 독일 함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독일 해군은 북해 돌파 따윈 안중에도 없이 상륙만을 목표로 노르웨이 연안에 붙어서 항해 중이었기에 영국은 엉뚱한 곳만 계속 수색했던 것이다. 결국 4월 8일 아침을 기해 독일군은 영국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격적으로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 노르웨이군은 병력도 적고 기습까지 받아 곳곳에서 격파되었고, 북부지역에 배치된 노르웨이군 연안방어선 2척도 끝까지 싸웠지만 압도적인 격차를 못이기고 격침당했다. 결국 침공 24시간만에 수도 [[오슬로]]를 제외하고 독일군이 목표로 한 모든 도시를 넘겨주고 말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_cruiser_Bl%C3%BCcher_sinking.jpg]]|| ||<:>격침된 블뤼허. [[도이칠란트급 장갑함|그라프 슈페]] 이후 두 번째 독일군의 주력함 손실이었다.|| 다만 수도 오슬로에서는 빈약한 노르웨이 해군의 반격이 있었다. 먼저 기뢰부설함 2척이 독일군 구축함 2척을 공격하고 순양함 [[엠덴급 경순양함|엠덴]]에게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며, 1문의 함포가 장착된 노르웨이 해군에 징발된 포경선 1척도 싸웠다. 이들 함선들은 분쇄될 때까지 저항했다. 그리고 수비군의 항전으로 [[해안포]]에 의해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가 격침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상륙예정지점인 협곡으로 가던 엠덴이 [[기뢰]]에 손상을 입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기뢰 제거를 위해 [[어뢰정]] 등 소형함을 먼저 돌입시켜야 하나, 당시 시간에 쫓기던 독일군과 상륙부대 사령관 쿠메츠 제독은 그냥 협곡 안으로 기함인 블뤼허를 먼저 돌입시켰다. 사실 어느 나라나 당시 기준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방어력이 높은 기함이 선두에 서는 건 똑같았기에 이 부분에서 쿠메츠를 비난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협곡 안에 기뢰가 수북히 깔려 있었기 때문에 블뤼허는 상당한 저속으로 항행 중이었는데, 이는 노르웨이군 요새포와 어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목표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실책으로 인하여 독일군은 귀중한 중순양함 중 하나를 어이없이 50년 먹은 요새인 오스카스부르크 요새(Oscarsborg Fortress)의 50년 먹은 11인치(280mm) '''[[독일 제국]]'''제 크루프 MRK L/35 [[요새포]]와 육상설치형 50년 먹은 구식 [[어뢰]]의 합동공격으로 날려먹고 말았다. 덤으로 블뤼허에 탑승했던 육군 산악부대원 다수와 승조원 일부도 전사했고, 사령관 [[오스카 쿠메츠]] 제독 등 생존자들은 노르웨이 항복시까지 포로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히틀러는 격침 소식을 듣고서는 크게 분노했으며, 반대로 현재까지도 이 전투는 노르웨이인들에게 큰 자랑거리로 남아 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뤼초와 엠덴 등 독일군의 오슬로 방면 침공함대가 일제히 퇴각했지만, 얼마 뒤 독일군은 곧바로 육로로 재진격을 개시해서 [[공수부대]]까지 투입한 끝에 예정한 것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결국 오슬로에 상륙, 점령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해당 지연시간을 이용해서 노르웨이 정부와 의회, 국왕 [[호콘 7세]](Haakon 7)와 왕가는 오슬로를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후, 은행에서 정부의 [[금괴]]를 가지고 내륙으로 피난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 정도. 이 과정에서 노르웨이군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이 항속거리 문제로 노르웨이에서 작전이 어렵다는 점을 간파, 몇 안되는 구식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들까지 모조리 띄우며 어떻게든 침공을 저지하려 했으나, 독일 본토에서 출발한 독일군 전투기들이 '''덴마크에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는 방식으로''' 노르웨이에 출현하는 바람에 모조리 격추당하거나 지상에서 주기된 채로 파괴되었다. 이어 뒤따라온 독일군 수송기들이 비행장에 강행착륙,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특히 오슬로 인근 포르네부(Fornebu) 비행장에선 의외로 거센 노르웨이군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들이 착륙에 실패하자 독일 공군의 [[Bf 110]]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보다 먼저 비행장에 강행착륙해 버렸다. 이에 당황한 노르웨이군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 틈에 후속 수송기들이 착륙에 성공해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런 활약으로 쉽게 점령한 비행장을 거점으로 해서 독일군 전투기들은 작전반경을 넓혀 나갔다. 4월 10일, 노르웨이 의회는 정부와 국왕 일가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항전을 부탁한 뒤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노르웨이군은 [[전차]]나 대전차 화기같은 중화기가 사실상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시에만 소집되는 [[민병대]]가 주력인 상태였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전력도 제대로 활용못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로웨이의 기갑전력이다. 일단 기갑차량으로는 스웨덴에서 수입한 란츠베르크 L-120 전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만든 경전차 1대와 3대의 장갑차가 있었다. 다만 이 차량들은 실전 투입되지 못하고 전량 유기되었다가 이후 독일군에게 노획되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있는 것도 활용 못한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거기에 숫자까지 모자라서 약 4개 사단의 규모에 불과했는데, 개전 첫주만에 3개 사단분의 병력을 상실하는 등 노르웨이의 저항은 빠르게 분쇄되어 갔다. 노르웨이 육군참모총장인 오토 루거 소장은 엽총이나 사격경기용 소총 같은 빈약한 무기를 들고 참여한 민간인 지원자까지 받아들여서 트론헤임 부근에 최후의 저항선을 만들었으나, 그들이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include(틀:navervid, vid=4C5ED9FE5043B1BDE3806ADFD10800810E81, outkey=V1267352e072e0e1fa5fb3a538259a915c94b7318c20c5402bf773a538259a915c94b, width=740, height=41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